좋은 사람으로 살아오느라, 나는 나를 잃고 있었다
지난 글에서,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는 그 안에 무거운 감정들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라 이야기했어요.
그 소원은 사실, 위로받지 못한 마음과 이루지 못한 감정들이 눌려 앉은 무게였죠.
그 소원을 계속 쥐고 있었던 나는 사실, 누구보다도 열심히 살아온 사람이었어요. 착하게, 묵묵하게, 남들에게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기 위해서 애쓰며 살았던 나.
이번 글은 그 애씀의 시간 속에서 놓치고 있던 ‘진짜 나’를 다시 바라보게 된 순간에 관한 기록입니다.
애쓰는 삶,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던 나
누군가에게 “넌 참 착해”, “정말 성실하다”, “너 덕분이야” 이런 말을 들으면 마음이 참 따뜻해졌어요.
그 인정이 나의 존재를 증명해 주는 것 같았고, 다른 사람에게 필요하다는 사실이 나를 살아있게 만들어주는 감각처럼 느껴졌죠.
그래서 더 열심히 했어요. 힘들어도 괜찮은 척, 하기 싫어도 웃는 얼굴로, 때로는 감정의 쓰레기통이 되어가면서도 말이죠.
하지만 그런 하루들이 쌓일수록 어딘가 나는 점점 희미해졌어요.
‘나는 왜 이렇게 힘들지?’ ‘누구를 위해 이렇게까지 하고 있는 걸까?’
그 질문은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조금씩 올라오기 시작했어요.
철학자 사르트르는 말했습니다. “우리는 타인의 시선 속에서 자신을 규정한다.”
나는 정말 나로 살아왔을까요? 아니면 ‘좋은 사람’이라는 타인의 정의에 나를 끼워 맞춰 살아온 걸까요?
무너진 감정 속에서 겨우 올라온 ‘왜?’라는 질문
어느 날, 너무 힘들어서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은 순간이 있었어요.
내가 이렇게 지친 이유가 단지 일이 많아서, 상황이 어려워서만은 아니란 걸 감정의 바닥에서 깨달았어요.
그건 나를 위해 애쓴 삶이 아니었어요.
‘좋은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는 믿음, 다른 사람에게 필요해야만 한다는 압박 그 안에서 나는 나를 내내 지우고 있었던 거예요.
“넌 없으면 안 돼”, “네가 있으니까 돼”, 그 말들이 따뜻한 칭찬이 아니라 내가 짊어져야 하는 짐처럼 느껴졌던 순간이 있었어요.
그리고 그 말들 뒤에 숨어 있던 건 내가 내 감정을 돌보지 않았다는 자각이었죠.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말합니다. “진정한 자아는 절망을 마주할 때 시작된다.”
그 절망은, 내가 너무 열심히 살아왔기에 놓쳐버린 나 자신에 대한 절망이었어요.
나는 왜 항상 괜찮다고 말했을까, 왜 감정을 참고, 넘기고, 묻고만 있었을까…
그 모든 ‘왜’라는 질문들이 내 마음속에서 쏟아지기 시작했을 때 비로소 나는 나를 꺼내 보게 되었어요.
덜 애쓰는 삶은, 나를 사랑하는 연습이에요
사람들은 가끔 말하죠. “애쓰지 않아도 괜찮아.” 그 말이 참 따뜻하지만 한편으론 허무하게 느껴졌어요.
나는 그동안 너무 애써야만 존재할 수 있었거든요.
하지만 그 애씀이 나를 점점 더 소진시켰다는 걸 지금은 알아요.
조금 덜 잘해도 괜찮고, 가끔은 솔직하게 말해도 괜찮고, 누군가에게 이해받지 못해도 내가 나를 이해하면 된다는 사실.
덜 애쓰는 삶은 게으른 삶이 아니라, 나를 위한 삶으로 돌아오는 과정이에요.
그건 남에게 보이는 나보다 내가 살아낼 수 있는 나로 존재하겠다는 다짐이에요.
니체는 말했습니다. “자기를 넘어설 수 있는 사람만이 자유로워진다.”
나는 더 이상 ‘좋은 사람’이라는 가면 뒤에 숨어 있지 않기로 했어요.
그보다 중요한 건 지금의 나를 다정하게 바라보는 용기라는 걸, 조금 늦게 알게 되었을 뿐이에요.
애써야만 존재할 수 있다는 믿음에서 벗어나며
이 글은 끝없이 애쓰며 살아온 어느 날, ‘나는 왜 이렇게 열심히 살아왔을까?’라는 단순한 질문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 질문은 내 마음속의 짐을 하나씩 열어보게 했고, 그 안에 감춰져 있던 슬픔, 억울함, 지침, 그리고 인정받고 싶었던 마음을 조용히 마주하게 했어요.
이제는 조금 덜 애써도 괜찮다고 내가 나에게 말해줄 수 있게 되었어요.
나는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이기 전에, 내게 먼저 필요한 존재였다는 것을 천천히 배워가고 있어요.
<이 글은 애쓰는 삶 끝에서 ‘나에게도 괜찮다고 말해준’
어느 조용한 날의 깨달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 솜사탕써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