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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너, 나-그것 관계의 철학 (마르틴 부버)

by 솜사탕써니(somsatangsunny) 2025. 6.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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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너, 나-그것 관계의 철학 관련 이미지

상대를 존재로 마주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시작되는 관계

 

 ‘나-너’의 관계는 단지 예의나 태도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철학적으로 인간 존재가 타인과 어떻게 ‘진짜로’ 마주하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입니다.

 철학자 마르틴 부버 “진짜 관계는 나-너의 만남이지, 나-그것의 사용이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한 문장은 우리가 맺고 있는 수많은 인간관계를 다시 바라보게 하는 깊은 울림을 줍니다.

 내가 누군가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그 사람을 어떤 시선으로 대하고 있었는지를 알게 되는 순간, 관계는 전혀 다른 결로 다가오게 됩니다.

‘나-너’란 어떤 만남인가

 마르틴 부버는 『나와 너(I and Thou)』라는 책에서 인간 존재는 두 가지 관계 방식으로 타인을 대한다고 말합니다. 그 하나가 바로 ‘나-너’  관계입니다.  

 ‘나-너’는 단지 말의 대상이 아니라, '존재 대 존재로 마주하는 응답 가능한 관계'를 의미합니다.

 여기에서 ‘너’는 어떤 목적이나 결과를 위한 수단이 아닙니다. 그저 있는 그대로의 존재로서 받아들여지고, 내 존재와 ‘지금 여기’에서 만나고 있는 대상입니다.

 ‘너’는 해석되지 않고, 평가되지 않으며,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로 받아들여지는 대상입니다.

 내가 그 존재와 함께 살아 있다는 감각, 지금 이 순간 진심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확신. 이것이 바로 나-너 관계의 본질입니다.

 이 관계에서는 비교도, 효율도, 기대도 사라집니다. 상대는 나에게 ‘무엇을 해줄 사람’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도 충분히 함께할 수 있는 사람’이 되죠.

 그렇게 마주한 관계는 깊고 조용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진짜 의미에서의 '만남'입니다.

‘나-그것’으로 변질되는 순간들

 하지만 많은 관계가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도 모르게 ‘나-그것’으로 변질되곤 합니다.

 ‘그것’은 목적이 있고, 기능이 있고, 기대가 있는 대상입니다. 나는 상대를 나의 필요에 따라 해석하고, 내 감정이나 상황에 맞춰 상대를 판단하게 됩니다.

 “왜 이렇게 해주지 않아?”, “그럴 거면 말하지 말지.” 이런 말 뒤에는 상대를 '기능적 존재로 바라보는 시선'이 숨어 있습니다.

 내가 기대한 만큼 반응해주지 않을 때, 상대를 비난하거나 실망하는 감정은 이미 그 관계가 ‘나-그것’이 되어버렸음을 보여줍니다.

 심지어 사랑하는 관계 안에서도 우리는 종종 상대가 나의 감정이나 욕구를 채워주는 역할로 고정되길 바랍니다.

 그러다 그것이 무너지면 그 사람은 ‘너’가 아닌 ‘그것’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이때 진짜 아픈 건, 상대가 나를 그렇게 대해왔다는 게 아니라 '나 자신이 그런 방식으로 타인을 대하고 있었다는 깨달음' 일지도 모릅니다.

 그 깨달음은 아프지만, 동시에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조용한 출발점이 되기도 합니다.

나도 타인도 존재로 마주하기

 ‘나-너’의 관계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일시적인 감정이나 호감만으로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진짜 ‘너’를 만나는 순간, 나는 나의 기준과 틀을 내려놓아야 하고,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 관계에서는 내가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으며, 상대를 평가하거나 설득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저 “너는 너로서 존재해도 괜찮다”는 마음으로 함께하는 것입니다.

 마르틴 부버는 말합니다. "나는 너를 통해 나를 이해한다.”

 그 말은 우리가 타인이라는 거울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더 깊이 알아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나-너’ 관계를 맺으려면 먼저 내가 나 자신과도 ‘나-너’의 관계를 맺을 수 있어야 합니다.

 내 감정, 내 실수, 내 연약함을 ‘그것’으로 치부하지 않고, 다정하게 나 자신을 바라보는 태도. 그것이야말로 타인을 존재로 마주할 수 있는 가장 깊은 준비입니다.

관계를 다시 바라보는 철학적 시작

 삶을 살면서 우리는 많은 사람들과 만납니다. 하지만 모든 만남이 ‘진짜 만남’은 아닙니다.

 어떤 만남은 지나가고, 어떤 관계는 상처를 남기고, 또 어떤 사람은 오래도록 마음에 남습니다.

 그 차이는 때로 아주 단순합니다. 그 사람이 나를 ‘너’로 바라봐 주었는가, 그리고 내가 그를 ‘너’로 받아들일 수 있었는가.

 ‘너’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 나를 ‘너’로 불러주는 사람, 그런 존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삶은 더 깊고 단단한 울림을 가집니다.

오늘 내가 누군가를 ‘그것’이 아니라 ‘너’로 바라보았는지, 스스로에게 조용히 물어보는 것으로 하루를 마무리해 보세요.

 관계가 어렵게 느껴질수록, 이 문장을 기억해 보는 건 어떨까요?

 “진짜 관계는 나-너의 만남이지, 나-그것의 사용이 아니다.”

 그 말은 다시 관계를 회복하는 길이 되어줄지도 모릅니다.

 

※ 마르틴 부버 『I and Thou(1923)』 참고

< 이 글은 ‘기대가 나를 아프게 했던 순간들’을

더는 미워하지 않기로 마음먹은 날에 쓰였습니다.    -솜사탕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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