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의 경계는 나를 지키는 마음공부예요
“그 사람은 내게 화를 냈고, 나는 그 화를 받아주었다. 그러고 나니 이상하게 내가 지쳐 있었다.”
이런 경험, 누구나 한 번쯤 있지 않나요? 누군가의 짜증, 실망, 속상함… 그 사람의 감정을 받아주는 순간, 나는 말없이 그 짐을 함께 짊어지게 됩니다.
처음엔 괜찮다고 생각했어요. 내가 이해하면 되니까, 조금만 참고 들어주면 되니까. ‘나라도 들어줘야지’ 하는 책임감도 있었고, 혹시 이 사람이 더 힘들까 봐 걱정되는 마음도 있었어요.
하지만 어느 순간, 나는 너무 많은 감정을 받아주느라 나의 감정은 꺼내지도 못한 채 점점 무거워지고 있었어요. 내가 감정을 떠안는 동안, 내 안에 쌓인 작은 감정들은 갈 곳을 잃고 조용히 응어리가 되어 갔죠.
이 글은 감정을 받아주는 사람의 조용한 무게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그 무게를 내려놓아도 괜찮다고, 철학과 마음공부가 우리에게 속삭여주는 다정한 메시지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익숙했던 역할, 감정을 받아주는 사람
친한 친구가 갑자기 전화를 해서 하루 종일 쌓인 불만을 쏟아냅니다. 상사에게 받은 스트레스, 가족과의 갈등, 별말 없이 듣고 있던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랬구나…” 하고 받아주죠.
그 친구는 통화를 마치며 말합니다. “너한테 말하니까 좀 괜찮아졌어. 고마워.”
그 말이 나쁘지는 않은데, 전화를 끊고 나면 왠지 모르게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 들어요. 가볍게 지나간 듯 보였지만, 그 감정은 내 어깨 위에 무겁게 남아 있었던 거예요.
내가 해소하지 못한 감정이 내 안에 차곡차곡 쌓여 있었던 거죠. 심지어 나는 나의 마음이 어떤지 생각할 틈도 없이, ‘잘 들어줬다’는 말에 스스로를 다독이며 넘어가곤 했어요.
늘 “잘 들어주는 사람”, “상대의 감정을 공감해 주는 사람”이 되다 보면 어느 순간 나의 감정은 말할 기회조차 잃어버리게 돼요. 나도 힘들었지만, 누구에게 말할 수도 없었던 거죠.
철학은 말합니다. 감정은 나눠야 하는 것이 아니라, 경계 지켜야 할 것
철학자 스피노자는 말합니다. “감정은 옮겨지는 것이 아니라, 영향을 주고받는 것이다.”
감정을 받아준다는 건 상대의 감정을 ‘해결해 주는 것’이 아니라 그 감정이 나에게까지 과하게 흘러들어오지 않도록 선명한 경계를 세우는 것이에요.
그 경계는 차가운 벽이 아니라, 내 마음을 보호하는 ‘따뜻한 울타리’에 가까워요. 그 울타리는 나를 막는 것이 아니라, 감정의 무게가 나를 짓누르지 않도록 지켜주는 공간이에요.
누군가의 고통을 듣는 건 공감이지만, 그 고통에 잠겨버리는 건 나를 잃어가는 시작일 수 있어요. 감정이 덮쳐오듯 밀려올 때, 그 감정을 잠시 바깥에서 바라보는 힘이 필요합니다.
가끔은 이런 생각도 해봐야 해요. “나는 지금 이 감정을 정말 들어줄 수 있는 여유가 있는가?” “혹시 이 감정을 받아주는 척하며 내 감정을 묻어버리고 있는 건 아닐까?”
감정의 쓰레기통이 되지 않기 위해선, 먼저 나의 감정부터 돌볼 수 있어야 해요. 그건 이기적인 게 아니라, 내가 건강하게 관계를 이어가기 위한 필수 조건이에요.
마음공부는 ‘감정의 주인이 되는 법’을 배우는 일
마음공부는 감정을 억누르는 일이 아닙니다. 그 감정이 누구의 것인지, 지금 이 감정이 내 안에서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를 천천히 바라보는 일입니다.
지인들의 짐을 들어주던 나날들. 가족, 동료, 친구… 나는 그들 모두를 돕고 싶었고, 그런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믿었어요.
하지만 그 과정에서 나는 너무 자주 나를 소외시켰어요. 나조차 나를 돌아보지 않았던 시간이 쌓이니 어느 순간 마음이 무기력해졌습니다.
감정을 받아주는 것도 결국은 선택입니다. 그리고 그 선택에는 나의 동의가 필요해요.
다음에 누군가가 무거운 이야기를 꺼낼 때 잠시 멈춰 이렇게 말해보세요. “오늘은 내가 좀 힘들어서, 그 얘기는 나중에 들어도 괜찮을까?”
이건 거절이 아니라, 자신을 지키는 다정한 표현이에요. 그리고 이 말은, 당신이 더 이상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주체가 되어가는 첫걸음이에요.
나도 이제 놓아도 괜찮은 감정들
나는 누구보다 잘 들어주는 사람이었고, 누군가의 마음을 안아주는 데 익숙한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더 무거워졌고, 그래서 더 자주 울고 싶어 졌던 걸지도 몰라요.
하지만 이제는 감정을 대신 짊어지는 일보다, 내 감정을 제대로 안아주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내가 안아온 감정들, 그중엔 내 것이 아닌 것도 있어요. 이제는 그 감정들을 하나씩 놓아도 괜찮습니다.
모든 걸 받아주는 사람이 아니라, 나를 먼저 돌보는 사람이 되는 것. 그게 우리가 철학을 통해 조금씩 배워가야 할 다정한 삶의 방식이에요.
그리고 그 삶은, 내 마음이 무너지지 않고 관계 속에서도 따뜻함을 잃지 않게 해 줍니다. 이제는 나도 내 마음의 경계를 그어줄 수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