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붙잡는 일이 아니라, 존재를 깨어나게 하는 일
우리는 모두 잊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기록이 필요하죠.
하지만 메모는 단지 정보를 저장하는 수단이 아닙니다. 그건 찰나의 사유를 붙잡고, 생각을 다시 만지고, 존재를 구성해 나가는 행위입니다.
이 글은 ‘메모’라는 작은 행위를 통해 철학적으로 기억, 정체성, 사유의 힘을 다시 바라봅니다.
잊기 위해 메모하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이 있게 존재하기 위해 메모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잊는 존재, 메모는 존재의 흔적
인간은 본질적으로 잊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시간을 두려워하고, 기억을 남기려 하죠.
하지만 메모는 단순한 기록이 아닙니다. 그건 사르트르가 말한 것처럼, “존재가 자기 자신을 향해 의식을 던지는 순간”, 즉 사유가 머물렀다는 증거입니다.
하루에도 수백 번의 생각이 스쳐 갑니다. 그중 대부분은 사라지고, 단 한두 개만이 메모 속에 머무르죠.
그 메모가 ‘기억의 조각’이 아니라, ‘존재의 증거’라는 것을 철학은 알고 있었습니다.
들뢰즈는 이렇게 말합니다. “기억은 반복이 아니다. 그것은 사유가 남긴 주름이다.” 메모는 바로 그 주름입니다.
내 안의 생각이 가장 조용하게, 그러나 가장 진하게 남는 흔적.
기억은 휘발되지만, 메모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메모는 언젠가 다시 나를 되돌아보게 하는 거울이 되죠.
누군가에게는 흘려 쓴 낙서일지 몰라도, 나에게는 존재가 머문 지점일 수 있습니다.
사유가 잠시 머물렀던 그 지점에, 시간이 지나도 꺼내볼 수 있는 문장이 있다는 건 얼마나 놀라운 일일까요.
메모는 사라지는 순간을 붙잡아 주는 조용한 구조물입니다.
메모는 생각을 붙잡는 도구가 아니라, 생각이 나를 바라보는 방식이다
우리는 흔히 메모를 "기억의 보조 장치"로만 생각합니다.
하지만 철학에서 메모는 ‘사유의 도구’이기 전에, ‘사유 그 자체의 형태’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은 하루에도 수십 개의 문장을 메모했습니다. 그는 사유가 정리된 뒤에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유가 정리되기 전에 적는 것”에 의미를 두었죠.
그건 아직 형태가 없는 생각의 덩어리, 그러나 그 불완전함 속에서 가장 솔직하고 날 것인 진실이 담겨 있는 순간.
쇼펜하우어는 말했습니다. “생각은 수증기와 같아서, 쓰지 않으면 사라진다.”
영감이 떠오를 때, 그걸 메모하지 않는다면 그건 한 문장으로도 태어나지 못한 진리입니다.
메모는 생각을 붙잡는 일이 아니라, 생각이 나에게 다시 질문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드는 일입니다.
생각을 저장하는 것이 아니라, 사유를 시작하게 만드는 방식이죠.
사람은 말보다 생각을 더 자주 하고, 그 생각 중 절반은 사라지고 맙니다.
메모는 그 사라짐을 거슬러, 마음이 머물렀던 순간을 불러오는 다리입니다.
말은 타인을 향하지만, 메모는 나를 향합니다.
그렇기에 메모는 가장 내밀하고도 정확한 ‘내 존재의 언어’입니다.
작은 메모한 줄이 나를 만든다
정체성은 언제나 완성된 모습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건 조각난 생각, 불완전한 문장, 단어 하나의 뉘앙스 속에 스며 있는 것입니다.
니체는 그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쓰기 전 오랫동안 산책 중 떠오른 생각을 메모지에 흘려 적었고, 그 메모들이 모여 그의 사유의 지도를 그렸습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말한 데카르트에게 생각은 존재의 시작이었고, 그 생각이 문장이 되었을 때 비로소 정체성이 구축되는 것이죠.
그렇다면, 우리가 매일 적는 짧은 문장들, 흘려 쓴 아이디어 노트한 줄, 길을 걷다 멈춰 기록한 낙서조차도 그건 어쩌면 ‘존재가 자기 자신에게 남기는 메시지’입니다.
메모는 완성된 글보다 더 진실합니다. 왜냐하면 메모는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해’가 아니라, ‘내가 나를 놓치지 않기 위해’ 남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생각은 흐르지만, 메모는 남습니다. 그래서 메모는 흐름과 고요 사이에서 나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작은 문장이 됩니다.
우리는 생각을 잊기 위해 메모하는 게 아니다
우리는 사유를 살아내기 위해 메모합니다. 메모는 작은 행위지만, 그 안에는 시간과 존재, 기억과 정체성이 고요히 겹쳐져 있습니다.
그 어떤 철학책보다, 당신의 손글씨로 남긴 한 줄의 메모가 당신의 생각과 감정을 더 잘 말해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메모는 사라질 생각을 붙잡는 것이 아니라 잊혀도 괜찮은 삶의 조각을, 다시 들여다보게 하는 작고 위대한 흔적일지 모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흔적을 따라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내가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를, 조용히 묻기 시작하는 거죠.